영화 <잉크하트> - 이야기에 대한 향수 혹은 뻔한 가족영화?


영화 <잉크하트>

감독: 이언 소프틀리
주연: 브랜든 프레이저, 시에나 걸로리


기대이상의 영화였다.
전체적인 흐름은 미국식 가족영화 그 이상은 아니었다.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과정에서 가족들은 서로의 사랑을 재발견하고
결국 그 사랑으로 악당들을 물리치는 스토리.

그 기본 뼈대 위에 이 영화는 일단 볼거리 면에서 1점 추가 포인트를 얻고 시작한다.
개성강한 캐릭터들은 다소 밋밋한 스토리의 약점을 어느 정도 보완해 준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이상인데,
특히나 책을 좋아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 매력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책 속 캐릭터들이 마술처럼 현실세계로 튀어나온다는 설정,
그리고 잊혀져 가는 책에 대한 향수.
거대한 서고라고 할만한 엘레나의 집 가득한 책들,
먼지 가득한 고서들,
그리고 그 고서들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제본가와
그의 또다른 모습인 실버통( 그는 책의 겉모습만이 아니라 그 내용까지 살려 내는 셈)

악당들은 글로 쓰여진 책속에서 나왔으면서도
글을 한 자도 읽을 줄 모른다, 그리고 자신들의 악행(?)을 카메라에 담으며 즐거워 한다.
악당들이 쓰러질 때, 그 카메라 또한 내동댕이 쳐지는 모습은
영상 매체에 압도당한 책들의 복수라고나 할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이 자체가 바로 영화아닌가 ;p

아무튼 이 영화는 사라져 가는 종이책(이야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단순한 가족 영화 이상의 울림을 갖는다.

또한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는 영화속 <잉크하트> 의 작가인 페노글리오인데
그는 작가로서 이 모든 소심하거나 잔혹한, 때론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들의 창조자이다.
하지만 그는 어딘지 엉성하고 둔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왜 아니겠나. 책 속에만 파뭍혀 사는 우리의 순진한 작가들이란 왜 이런 모습이 아니겠나.
그는 필경 대형서점 경영서 섹션에서 잘나가는 자기계발 책 따위는 쓸 줄 모르는
"소설따위"나 써대는 작가 나부랭이 일 것이다.

그래서 이런 현실을 떠나, 차라리 자신이 창조한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길 선택했을터.
우리의 어리숙한 이 순수한 정신의 창조자는 그 속에서도 또 다른 이야기들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들려 주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 내내 귀를 즐겁게 하는 영국식 억양(특히 고집센 엘레나의 그 표정과 발음이란)과
메기역의 엘리자 배넷의 연기도 흥미로운 볼거리.


이 영화를 먼저 원작 소설을 접한 후 본 사람들은 실망이 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원작을 다른 매체로 재제작했을 때 생기는 흔한 문제이며,
늘 그렇듯, 애당초 원작을 복원하겠다는 생각은 접고,
활자든 영상이든 자신이 가진 강점을 활용하여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만들겠다는
접근법이 훨씬 유용할 것이다.

나의 경우는 영화를 본 후에, 원작 소설을 읽고 있는 중이라
다행이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영화가 원작 소설의 속깊은 울림을 담아내지 못했다는 아쉬움 못지 않게
영화 자체도 꽤 재미있게 짜여진, 나름 선저한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영화는 가족, 연인 모두가 함께 보아도 될 만큼 괜찮은 영화이다.
아울러 그 원작 소설은 그 이상으로 빛나는 작품이라는 것을 첨언하며...

by neooen | 2009/02/02 01:07 | 보다 그리고 말하다 | 트랙백 | 덧글(0)

2009 이상문학상 대상-김연수<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서기 2000년대, 광장으로 가는 길 :
2009 이상문학상 대상 - 김연수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 첫인상


너무 짧다.
내가 그의 소설이 실린 2009년 이상 문학상 수상집을 사 들은 이유이다.

단편 소설로서도 그의 소설은 무척이나 짧았다.
이상 문학상은 작가가 아닌 작품에 주어 지는 상으로,
특히 작품의 표현적(언어적) 마감의 완성도를 중시하는 상이다.
재기에 찬 문제의식으로 우수작에 오르고도 대상을 수상하지 못하는 작품들은
미적 완성도라는 면에서 깔끔한 마감을 보여 주지 못한 경우가 많다.

나는 이 짧디 짧은 소설이 이상 문학상 심사 위원들의 입맛을 만족시킬 만큼의
마감능력을 보여 주었다면, 일단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읽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그의 이 짧은 단편을 지금까지 세 번 읽어 보았는데,
저마다 코끼리, 코뿔소, 매머드 등 가지각색의 동물들을 대동하고 광장을 향해가는
인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화자로 하여금 불면의 밤을 보내게 하는 것은 내면에 갇힌 고통이다.
그 고통이란 코끼리라는 상징물로 대신되는 추상적 산물이다.
물론 외상 증후군은 육체적 고통을 수반하다는 글 중 화자의 강변처럼
고통은 어떤 상징도 추상화도 거부되는 '육체적'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끝없이 '거울 기법'을 통해 대화하며 서로를 이해하려고 애를 써도
결국은 각자 자기 안에 간직한 고통이란 결국 자기 자신만의 몫이며,
그 증상도, 원인도, 해결책도 불분명한 채,
그곳에 '있다'.

우리는 그것이 명백히 '있다'는 사실만을 알 뿐,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누구에게 마땅히 설명할 수도, 지워 버릴 수도, 잊어 버릴수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져 걷는 것 뿐이다.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그러다 이 산책은 고통에 대한 전문가 Y와 만나게 되며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이제 산책은 어쩔할 도리 없는 마지막 선택의 산물이 아니다.
나는 거울 기법을 배워 실습하고 있지만
Y는 거울 기법 없이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한다.
그러나 Y는 고통을 웃음으로 바꾸는 법을 고통을 통해 배웠다.
고통을 이기는 법이 아닌 대하는 법을 암이라는 자신의 고통을 통해 배운 것.

그들은 이제 광장으로 간다.
광장에 나온 이들은 저마다의 동물들을 함께 데리고 나왔다.
이제 고통은 자기 안에 갇힌 추성적인 상징물이 아니다.

저기 넘실거리는 촛불, 저 함성을 들으라.
자기 안의 추상화된 고통들이 거리로 터져 나와 현실이 되고 있다.
화석화된 고통은 이제 화석을 벗어나 현실 속에 살아 숨쉬는 존재로 깨어나고 있다.

화자는 바로 그 지점을 목격한다.

...이 소설은 거기까지이다.
무엇인지 얘기할 수 없는, 하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고통.
그것들이 거리로 터져 나와 충돌하는 그 광경에 대한 경이에 찬 눈 빛.
그 눈 빛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그의 다른 작품들을 더 읽어 봐야 분명해 질지도.

하지만 어쨌든 김연수의 이번 작품을
서기 2000년대에 내면 속에 갇히 고통들이 이제 막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순간에 대한 목격담이다.

이 2000년대의 히치 하이커들은 과연 자신들의 여정을 산책으로 마무리할 것인가.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같다. 그의 촛불시위에 대한 관심이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는
지적을 놓고 보면, 좀 더 살펴볼 여지가 있을 듯하다.


아무튼 어떻게 이 소설의 이상문학상 심사 원로들의 입맛을 만족시켰는지
알 것같다. 물론 타 소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은" 소설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푸념한다 해도...아무튼 그의 작품이 평균이상의 가치와 완성도를 지니는 것은 인정!



by neooen | 2009/01/31 00:14 | 오늘 일기 | 트랙백 | 덧글(0)

맥북 화이트 업그레이드... 나는 정녕 바보인가


지난 1월 10일 결국 맥북 블랙이를 카드를 긁었다.

당초 할인 판매한다던 화이트를 사려 했지만
아마 환율 문제 때문에 매장에서 접은 모양이고,
화이트에 계속 마음이 쏠렸지만,
블랙이는 불과 몇 천원 차이로 메모리 1기가 더 얹고 클럭 스피드도 쬐금 높았다.

사실... 원래는 아이맥을 노리고 있었는데,
나의 엉성한 시나리오는...
애플이 마지막으로 참가한 지난 맥월드에서 아이맥 신형이 나오고
연식이 있는 구형 아이맥이 소폭이나마 가격이 다운되면 그걸 노려 보겠다는...
말도 안되는 심산을^^

하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무리한 상상은 단지 황당한 상상으로 그쳤고,
결국 맥북이 쪽에서 그것도 당초의 화이트도 아닌 느닷없는 블랙이를 선택했다.

언제나 그렇듯, 맥은 사진보단 실물이 낫고,
보는 것보다 직접 써보는 것이 만족도가 높지 않은가...

블랙이는 예상외로 마음에 들었다... 분명히... 정..말로... 그...런...데!! ㅋㅋㅋ


이건 왠 날벼락... 그닷없는 마이너 업그레이드를 단행했다.
가격은 동결, 클럭스피드 약간 낮추고, 대신 GPU 지포스로 업,
램도 2기가로 얹고 게다가 Ilife9(!!!!!)를 번들로 한다는데...

니미... 그럼 난 뭐야...

아마 그 와중에 애플 오프 매장의 블랙이 마지막 재고를 이렇게 신나게 소비해 주는
만득이는 나 밖에 없지 싶다...
한달도, 두달도 아니고...10여일 차이로... 완전히 새된 기분이란 -.-;;;;


한동안 마음 속에서 폴폴 피어오르는 자괴감...
애플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말그대로 나 자신에 대한 자괴감...

난 진정 바보인가...
도대체 이러자고 몇 달동안 소쩍새는 울며 불며
매장을 들락날락, 인터넷을 뒤지고 또 뒤지고, 밤잠을 설쳐 가며 결국 긁었는가...


사실, 나에겐
모든 라인업의 마지막 제품을 구입하자는 묘한 신조가 있는데,
라인업의 마지막이란 하드웨어적으로는 가장 안정화된 모델이고
가격도 끝물 가격이고 등등...

헌데... 이런 느닷없는 마이너 업은....
카보네이드 맥북의 마이너 업그레이드를 읽어 내지 못한 내 불찰....


....아니다.. 자 숨을 고르자.

자 그대 말해보아라.

그대는 기실 지포스든 뭐든 큰 상관 없지 않은가. (...그래도...)
그대는 지금도 예상외의 블랙이 뽀대에 대만족하지 않는가.(...그래도...)
그대는 결국 가치 창출은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에서 나온다는 사실,
그리고 그대하기 나름이라는 사실을 알지 않는가. ( ...그래도...)


...그래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내 의식 저편에서는 아직도 "그래도..."가 메아리친다.

마음이 싱숭밍숭하다...

그런 새벽이다... 아 출근하기 싫다... (...우껴!!! 카드 값 갚아야지!!! )

by neooen | 2009/01/30 01:29 | 오늘 일기 | 트랙백 | 덧글(0)

이청준, 비화밀교- 그래도 현실은 언제나 강력하다


이청준의 <비화밀교>를 다시 읽다.

푸코의 죽음이후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간 하버마스를 놓고
대가들조차 죽음 앞에선 약해지는 것 아니냐던 김현 선생의 말처럼
이제 저편으로 넘어간 선생의 작품들 앞에서 누구도 냉정할 수만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80년대를 넘으며, 소위 리얼리스트들의 줄기찬 공격에도 이청준이 이룩한 하나의 세계는
한국 문학에 하나의 전범으로 자리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자신에 대한 비판에 앞서, 기실 이청준 자신이 소설가로서 자신의 역할에 대한 회의,
현실 앞에서 왜소해 지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일말의 죄의식에 스스로 많이 상처받고 있었음은
그의 소설에서도 나타난다.

<비화밀교>는 5.18 광주 사태에 대한 이청준이란 작가의 힘겨운 고백이다. 그 시원을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산행에 관한 이야기에서 작가는 일종의 패배를 시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수십년 아니
어쩌면 수백년 동안 이어져 왔을 그 비밀스러운 산행은 산 아래의 현실에서 있었던 죄과들 씻고
서로 용서하며 화해하는 자리로 이어져 왔다. 그래서 그 비밀스러운 산행은 모든 것을 묻고
다시금 산 아래의 현실로 돌아가는 화해의 장이자, 다시 태어남의 자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 일단의 젊은이들이 그 의식을 방해하고 나섰다. 기실 그들은 방해가 아닌,
그 의식을 완성하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누구도 잘잘못을 묻지 않고 조용히 불을 묻고 돌아서면 되는
단순한 의식, 하지만 그들은 그 행렬을 온 몸으로 막아서며, 다른 이들에게 묻고 있다.
정말 그것으로 충분한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아무 죄없이 피흘리고 죽어갔다.
그런데 세상 모두가 침묵하며, 또한 죄인은 말이 없고, 죄없는 자들은 반란군이란 오명을 쓰고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도 당신들은 이런 하루밤의 횃불놀음으로 모든 것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정말 그것으로 족한가?

소설가는 소설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고, 동시에 독자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세상을 향한 성실한 탐험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실은 어찌 강력하지 않은가.
지금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 현실은 어찌 강력하지 않는가
그래서 글쟁이란 언제나 현실 앞에서 무력하기만 존재가 되는 것.
언제나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알리바이를 만들어 내기 위해 진땀을 빼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되는 것.

이청준 세대에 비하면, 지금의 소설가들은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가벼운 글들을 쓸 수 있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난 다만 소설가일 뿐인데. 그래서 어쨌든 말인가. 나는 다만 글쟁이일 뿐이다.
맞다. 글쟁이가 예수도 아니고 마치 세상의 짐을 다 진 것같은 얼굴을 하고 다닌다고 박수쳐 줄 그런 세상은
이미 갔다. 왜 아니겠나. 세상은 이미 변했다 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러한 때, 왜 나는 다시금 이청준을 꺼내 읽고 있는가.
작가 아니라 누구에게도 세상을 짐을 모두 다 지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당신이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당신은 세상의 일들에 일정부분 책임이 있음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세상의 짐은 모두 지지는 못해도, 그 작은 책임마져 부정할 수는 없지 않는가.
하다못해 고급 상점에 진열되어 당신의 카드를 꺼내게 만든 그 고급 브랜드가 만약 가짜라면,
당신이 먹고 있는 음식 속에 멜라닌이 들어 있다면, 그것을 당신의 아이들이 먹는다면.
그래서 당신도 나도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선 것이 아닌가.
우리는 스스로 정치적인 존재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결국 이청준은 자신이 추구하는 세계는 물론, 그 세계를 향해 걸어가는 자로서의
알리바이를 끝없이 만들어 내고 있다. 이는 철지난 세대의 옛질문이 아니다.
그 형태는 달라질지언정 이 참담하고 가열찬 현실 앞에서 나는 과연 누구인가 질문하는 것은,
내가 무엇으로 밥벌이를 하든, 내가 언제 누구와 침대 위에서 어떤 체위로 섹스를 하든
일정부분 세상과 말을 섞고 있다는 사실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인 이 삶 속에서
여전히 유효한 행위임을 이청준의 작품들 속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시간의 문>에서 그가 탐구하였듯, 결국 미래의 시간으로 넘어가버린 자는
그의 목표를 이루었을지 모르지만, 이곳에 남겨진 우리의 고된 삶, 기쁨, 눈물, 웃음은
여전히 우리의 몫으로 남겨진 것이다. 떠난자는, 그래 떠나도 좋다.
하지만 그의 남겨진 사진이란 우리에겐 하나의 상징일뿐,
우리의 삶은 상징도 우화도 아닌 현실 그자체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금 우리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가는 소설가로, 영화감독을 영화감독으로, 음악가는 음악가로.

글쟁이는 글쟁이로 남을 자격이 있다. 이청준은 그 확실한 알리바이의 한 전형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정직하고 성실한 이 거장도 감히 말하건데,
어찌되었든 현실은 언제나 강력하다.

by neooen | 2009/01/26 14:58 | 오늘 일기 | 트랙백 | 덧글(1)

보르헤스, 그 따듯한 숨결

"그들은 나갔다. 물론 달만에게는 희망이 없었기 때문에 두려움 또한 없었다. 문턱을 넘으면서
그는 주사를 맞았던 요양원에서의 첫날 밤에 이처럼 창공 아래서, 자발적으로 칼을 가지고 싸
우다 죽었다면 그것은 일종의 해방이고, 행운이며, 축제가 되었을 거라 느꼈다. 그는 그 당시 만일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거나 꿈꿀 수 있었다면 바로 이런 죽음을 선택했거나 꿈꾸었을 거라 생각했다"
(p.284 <남부>, [픽션들], 황병하 역, 민음사)


죽음을 맞이하는 담담한 제스쳐.
끝도 없이 반복되는 삶, 우리는 누군가의 기억일지도 모른다.
그 영겁의 시간동안 우리가 나고 죽는 일이란 얼마나 사소한 사건들인가.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이미 시력을 상실하고(유전적으로, 가족력에 따라 이미 예견된 실명이라니)
어두운 방에 홀로 앉아 속삭이듯 조용히 읆조리는 그의 목소리 어디에도 우울함 따위는 없다.

깊은 어둠처럼, 깊은 고독 속에 홀로 있는 보르헤스.
그러나 오히려 우리의 어깨에 손을 얹고 우리에게 농담을 건네는 그.
그의 따듯한 손길 속에서 그가 삶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느낀다.

그는 아직도 말한다.

"나는 이 고독 속에서 이 아름다운 기다림으로 가슴이 설레고 있다" (p143, <바벨의 도서관> 상동)


알듯 모를듯한 곳, 신비하면서도, 한 없이 고독하고, 그래서 더 아름다운 곳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그를, 그래서, 우리는, 사랑할 수 밖에, 없다.



by neooen | 2009/01/25 22:44 | 오늘 일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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